국내여행

[전남] [강진군] [다산초당(茶山草堂)] 정약용 선생의 다산초당(茶山草堂)을 가다.

happyzhang 2024. 8. 17. 09:08
728x90
반응형

남도여행 2024 | 2일차 | 2024. 8. 16 (五)
전라남도 | 강진군 | 다산초당(茶山草堂) |
        
오늘은 남도여행 2일차, 역시 무더운 하루가 될 듯 싶습니다. 오늘의 방문지는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나름 의미가 있는 여행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차장에서 다산초당(茶山草堂)까지는 약 300m, 그런데 그 길이 꽤 길게 느껴집니다. 잠깐 올라 가는데 온 몸이 땀으로 젖어 듭니다. ㅋㅋ
      

      
다산초당(茶山草堂),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이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강진으로 귀양을 와서 18년 중 10년동안 생활하던 집이다. 이 곳에서 정약용은 유배가 끝날 때까지 생활하며 학문에 몰두한 끝에 목민심서를 비롯한 숱한 저서들을 남겼다.
      
1800년 다산을 총애했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의 시련이 시작되었으며, 이듬해인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조선 가톨릭 신자이자 다산의 조카딸 사위로 알려진 황사영이 청국에 있는 가톨릭 주교인 구베아 주교에게 백서(帛書)를 보낸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여기에 보수 유학파(儒學派) 신하들로부터 서학(西學, 가톨릭 교리)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인신 공격과 모함까지 이르면서 결국 현재의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정약용이 처음부터 이 곳에서 18년 간의 강진 유배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엔 강진 읍내의 주막인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에서 주모의 호의로 4년간 생활하였는데 정약용은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야사로 이 주모의 딸이 정약용을 흠모한 끝에 정약용과 '통'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사의재는 강진군이 2007년에 복원해서 문화 관광 해설을 제공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이후 고성사의 보은산방, 학래 이청(정약용의 제자)의 집 등을 전전하다가 47세이던 1808년 봄에 윤단(尹慱, 1744~1821)의 산정(山亭)인 귤동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을 초당으로 초빙한 이는 윤단의 아들인 윤규로(尹奎魯, 1769~1837)였다. 윤규로는 자신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다산에게 배우게 했다. 다산은 18년(1801~1818)의 유배 기간 동안 다산초당에서 11년가량(1808~1818)을 머물렀다.
      
다산이 윤단의 산정으로 오게 된 것은 어머니가 해남 윤씨였기 때문이다. 외가 쪽 친척의 소유였던 산정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다산의 외가는 해남윤씨로 고산 윤선도의 가문이다. 다산초당의 원래 주인인 윤단은 윤복의 6대손이고, 윤복의 형인 윤형의 5대손이 인물화에 탁월했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이다.
공재는 윤선도의 증손자이기도 한데, 공재의 셋째 아들 윤덕렬의 딸이 다산의 어머니이니, 공재의 손녀이다. 결국 산정의 주인인 윤단은 다산에게 먼 외가 친척인 셈이다.
      
다산초당은 1963년에 사적 제107호로 지정받았다.
다산초당에 걸린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나무위키]
    

다산초당 가는 길
다산초당이 보입니다.

        
동암,
송풍루(松风楼)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 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宝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안내문]
      

      
다산초당과 서암,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는 윤단의 산정(山亭)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 1957년 다산유적 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했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서암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면서 밤 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阁)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안내문]
        

    
잠시동안의 만남 그리고 이별, 이제 산을 내려 갑니다. 왠지모를 뻑뻑함을 가슴에 지닌채...
      
강진을 지나간다면 꼭 한번씩 들러보시길 적극 권해 드립니다. ^^

728x90
반응형